2013/06/19 11:49

[청년 개발 핸디 크래프트] 매력녀, 찌찌(chi chi) 예찬론 - 베트남 사회적기업/공정무역

* 이 글은 여행대안학교 '로드스꼴라' 4기의 베트남&라오스 여행 문집에 실린 글입니다.




< 매력녀, 찌 찌(Chị Chi) 예찬론 >

- 로드스꼴라 길별, 부탄




*베트남어로 Chị는 손위 여성의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이다. ‘찌 찌(Chị Chi)’는 베트남어로 ‘찌 언니’라는 뜻이다.

 
”저… 아직 학생들이 자고 있지 않다면, 내가 살짝 들어가도 될까요?”


 갓 샤워를 마치고, 촉촉한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안은 찌찌가 여자 방문 앞에서 멈칫하며 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 그럼요. 들어오세요.“


 깻도안 사무실의 2층 창고에 정성스럽게 마련해주신 잠자리 위에서 다 같이 헤벌레 누워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있던 아이들은 찌찌의 갑작스런 방문에 스물스물 이불을 둘러매고 일어났다.
 
 “오늘 어땠나요? 피곤하죠?”


 이곳 ‘깻도안 누에, 커피 농장’의 공정여행을 책임지고 있는 찌찌가 엄마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첫 만남부터 아이들에게 ‘언니라고 불러요’라고 쿨하게 말했지만, 사실 누가봐도 엄마 혹은 이모 뻘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열심히 언니라고 불렀지만.

 
“아니요오오오… 괜찮아요오오오…”


 저런, 영혼 없는 대답들. 내가 민망한 미소로 찌찌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함박 미소를 띄운다.


 “제가 사실 오늘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어요.”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중하게 입을 여는 찌찌의 말에 아이들이 눈이 반짝인다. 그녀는 분명 사람들을 주목시키는 무언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작은 다락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선이 고정된 가운데 찌찌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는 어릴 적에 베트남 남부 메콩강 근처의 빈롱(Vinh Long)성에 살았어요. 우리 동네는 매우 가난했고, 우리 집도 매우 가난했죠. 열 일곱 살쯤 되어 나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호치민시(Ho Chi Minh City)로 나와 공장에 들어갔죠. 내가 처음 일하게 된 공장은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그 공장은 굉장히 열악했어요. 근무는 새벽부터 시작해서 밤늦게야 끝났죠. 쉬는 날도 없었구요. 공장 옆의 컨테이너 기숙사에서는 요만한 작은 방에 여러 명이 꽉 차서 자야만 했죠. 선풍기, 냉장고는커녕 화장실도 공용이었고, 뜨거운 물도 없었죠.

 베트남에서는 임신을 하면 4개월간 출산휴가를 받고, 보험금으로 수당도 받고, 출산 후 당당히 돌아와서 일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 사장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4개월의 출산 휴가는 커녕 출산 수당을 다 받지도 못했고, 출산 후에 다시 못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어요. 베트남에서는 당연한 건데 말이죠.

 내 친언니가 재봉기술자로 나보다 먼저 일하고 있었는데, 몇 년간 그곳에서 일하면서 몸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그런 환경 속에서 몇 년을 고되게 일을 하니 몸이 성할 리가 없죠. 나는 그 상황과 우리 언니를 보면서 8개월 만에 그 공장을 그만두었어요. 언니의 지금 모습이 몇 년 뒤 내 모습일 것만 같았어요. 나는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죠.”


 잠시 모두의 침묵이 흘렀다. 창 밖의 매미 우는 소리, 문 밖에 남자 애들이 떠드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어릴 적, 나는 두 개의 나라를 너무 싫어했어요. 하나는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싫어하는 중국. 그리고 다른 하나는… “


 “한국이요?”


 한 아이가 되물었다. 그러자 찌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한국. 내 고향 빈롱에서는 한국으로 시집가는 여자들이 많았어요. 어릴 적부터 나는 늘 한국으로 시집을 가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라왔고, tv에서는 한국으로 시집 갔다가 남편에게 맞거나 죽은 베트남 여성의 이야기가 나왔어요. 나는 그때부터 한국이라는 나라가 싫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첫 직장인 호치민시의 한국공장에서 일하면서 한국이 더 싫어졌어요.”


 아이들 얼굴에 조금 당황스런 빛이 돌았다. ‘이런 얘기를 왜 하는 거지?’라는 궁금증 어린 표정부터 ‘안 됐네..’라는 공감의 표정까지. 나 역시 이번 베트남 여행 중 처음 맞는 낯뜨거움 이었다. 
 
 사실 내가 2년 동안 지냈던 하노이 외곽의 시골 마을에서조차 한국에서 일하다 온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집 아줌마의 조카, 슈퍼 아주머니의 친척 동생, 동네 쎄옴(오토바이 택시) 아저씨… 등 한국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귀국 이주 노동자’들이 그 당시 ‘한국인 이주노동자’ 신분이었던 내 주변에 널려 있었다. 넉살 좋은 하노이 사람처럼 그들과 한바탕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한국생활이 어땠냐는 나의 질문에는 모두들 하나같이 ‘한국 이쁘다’, 한국 깨끗하다’, ‘한국사람 똑똑하다’ 정도의 대답뿐, 정작 내가 궁금해 한 그들의 진짜 한국 생활에 대한 사담은 일체 들을 수가 없었다. ‘좋은 게 다 좋은 거다’ 라고, 앞에서 얼굴 붉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의 성향 덕분에 더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내 옆에서 이야기하는 이 여자를 보라. 이렇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쏙쏙, 그것도 직구로 시원하게 던져줄 수 있는 베트남 여성을 만난 건 나 역시 첫 경험이었다. 찌찌의 당돌함에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간 대답 없이 반복되었던 내 질문들이 방향을 찾은 듯 하여 나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면 불편했을 수도 있을 이야기를 찌찌는 솔직하게 이어나갔다.


“’아맙(AMAP)’이라는 단체를 만났어요. 어느 날 우리 ‘청년 개발 핸디 크래프트’ 사무실로 구수정 선생님과 권현우 선생님이 찾아왔죠. 그리고는 그들이 중부에서 하고 있는 많은 일들을 알게 되었어요. ‘아, 이런 한국 사람들도 있구나’,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한국에 대한 마음을 열고 그들이 하는 일을 응원하게 되었고, 이렇게 오늘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어요. 여러분은 제가 처음 만난 한국 청소년들이에요. 근데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하면서 한국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라는 하나에요. 하하하하 맞아요. 중국이에요.”


 베트남 내 큰 중국 공장들의 열악한 노동자 환경,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아직 중국은 좋아할 수 없겠다면서 호탕하게 웃는 찌찌, 그녀를 보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비친다.




* * * * *




 내 베트남 이름은 ‘링(Linh)’ 이다. 4년 전 처음 하노이에 도착해서 만난 베트남어 선생님이 이름을 지어달라는 내 요구에 귀찮은 듯,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 이름을 준 게 시작이었다. 그 후로 베트남에서 나는 줄곧 ‘링’ 이었다.


 “링, 내가 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농민들과 함께 협동농장에서 커피나무를 자르고, 뽕잎을 따는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마당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내 옆으로 찌찌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학을 가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어요. 영어선생님을 구한다길래 찾아 갔는데, 길거리 비닐하우스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죠. 부모가 없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놀며 지내는 곳이었는데, 저는 3일째가 돼서야 그곳에서 저한테 급여를 줄 수 있는 형편이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자원봉사자를 모집한 것이었죠. 저는 당장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른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그만둔다고 말했어요. 아이들은 펑펑 울더군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구할 때까지 며칠만 더 있기로 했는데, 그게 며칠이 되고, 몇 주가 되고, 몇 달이 되더니, 결국 몇 년을 그곳에서 활동하게 되었지요. 하하. 다행히 그 간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했구요. 차비조로 한 달에 만 원 정도를 주었지만, 일주일에 두 번씩 그곳에 갈 때마다 과자니 우유니 사가느라 정작 제 돈을 더 써야만했죠. 수년간 활동하면서 아이들이 자랐고, 그때 처음 초등학생으로 만났던 친구들은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죠. 저기 투이(Thuy) 보이죠? 투이 저 친구도 초등학생일 때 그 비닐하우스에서 저를 처음 만났어요.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다가, 저희 ‘청년 개발 핸디 크래프트’의 정식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한쪽에서 열심히 짐을 나르고 있는 활발하고 성격 좋은 스물다섯의 투이(Thuy). 호치민에서부터 우리의 럼동성 깻도안 공정 여행을 찌찌와 함께 준비해 온 친구다. 늘 함께 있으면 기분 좋은 에너지를 가득 내 뿜는 이 젊은 친구가 찌찌의 첫 학생이었다니, 이 공간에서 풍기는 오랫동안 묵힌 연대의 느낌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찌찌(찌 언니)’라고 해도 될 법 한데, 투이는 늘 ‘꼬찌(찌 선생님)‘ 이라는 호칭을 쓰더라니..


 “그러다 저는 대학원에서 국제개발(International Development)을 공부했어요. 그리고는 베트남의 여러 로컬 NGO에서 PM(Project Manager)로 일을 하게 되었죠. 덕분에 필리핀에서 1년간 더 공부를 할 기회도 있었고요. 기존 국제개발 NGO의 한계를 느꼈어요. 다양한 지원으로 자립을 돕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그들 스스로의 힘을 합쳐, 함께 천천히 성장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제가 일하는 ‘청년 개발 핸디 크라프트’는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수공예품을 만들고, 공정여행을 진행해요. 호치민 시내에 사무실과 수공예품 매장은 있지만, 작업장은 일부러 호치민 외곽에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줄어든 임대료로 작업장 옆에 노동자들의 숙소를 만들었어요. 저희 기숙사엔 선풍기와 냉장고, tv도 마련되어 있어요. 물론 각자 잘 수 있는 공간도 넉넉하고요. 그리고 임신한 여성, 출산 휴가를 받은 여성, 그리고 출산 후 갈 곳이 없는 모든 여성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지요.“


 이미 열 명 남짓한 직원 중에 2/3 정도가 임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내내 과거 한국공장의 노동자였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는 듯 했다. 그리고 몇 번씩이고 기숙사의 설비와 이용 환경을 자랑하며 그녀가 자신의 일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냈다. 한 때 노동자의 신분으로 상처를 받았던 그녀가 어느새 지금은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녀의 소망은 좋은 회사를 다니는 것도, 이제 갓 8개월 된 딸아이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닌, 여성 노동자들이 지금처럼 편안한 환경에서 계속 어울려 즐겁게 일하고, 올 해 깻도안의 커피와 누에 수확량이 더 많아져서 모든 조합 노동자들의 임금이 조금씩 올라가는 것이었다.

 땀 흘려 일한 만큼의 노동의 힘을 아는 그녀, 나 혼자 아니라 함께 어울려 잘 사는 법을 꿈꾸는 그녀, 한국에서 온 청소년들을 위해 계획에 없던 ‘짜죠(베트남 만두)’ 요리 교실을 만들고 40인분의 김치를 직접 담궈 멀리까지 가져와 조심스레 내미는 그녀, 아무리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 이렇게 당돌하고도 푸근한 ‘찌 언니’, 내 어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진_부탄 : 매력녀 찌찌와 함께하는 요리교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facebook 명함

통계 위젯 (화이트)

26
31
77684